『조선문단』은 문예지로서 1924년 10월에 창간하여 1936년 1월호로 종간되기까지 총 26호가 발간되었다. 두 차례의 휴간(1925.12~1926.2, 1926.7~1926.12)과 속간(1927.1 /1935.2)을 거듭하면서 1920~30년대 한국문단을 주도한 문예지의 하나였다.
『조광』은 1935년 11월 1일에 조선일보사가 창간한 시사종합지로 1945년 6월까지 통권 113호가 발간되었다. 『조광』은 당시에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조선일보사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당대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여 문화를 주도했던 주요 매체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자본주의적 대중문화의 실상을 『조광』만큼 잘 구현해냈던 잡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1893.5.6 출생 1910 난곡 이건방(蘭谷 李建芳)으로부터 한국화한 양명학을 수학하기 시작 1911- 1912 중국으로 이주.동북성 회인현(懷仁縣) 흥도촌(興道村)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등지에서 활동하며 이회영(李會榮) 형제와 만남. 이회영 형제의 독립군양성소를 위한 군자금 지원. 1913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 이동하고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김규식(金奎植) 등 많은 청년애국지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동제사 조직. 1922 4월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초빙을 받아 조선문학론과 한문을 강의하기 시작. 중앙불교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국학 및 동양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 1926 6·10만세 운동을 지원,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창립, 현충사 중건, ‘조선고전해제’ <동아일보>에 기고. 1937 [경훈훈민정음서], [훈민정음운해해제] 저술 1943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가족을 이끌고 전북 익산군 황화산(皇華山)으로 들어가 산중 생활 시작. 1945 광복 후 국학진흥 운동에 매진 1948 여러 인사의 천거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새 정부의 감찰위원장에 취임, 1949 감찰위원장 사임. 1950 7월 북한으로 납북 1950 11월 사망 공식 발표. 1990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됨.